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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주의의 탄생

짱깨주의의 탄생   김건흡 MDC시니어센터 회원 / 중국 근현대사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만큼 독특한 캐릭터도 없을 것이다. 계속되는 행운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결국 인생을 불행하게 끝마친 인물이다. 위안스카이에게 인생역전의 기회를 준 사건은 조선의 임오군란이었다.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광동수사제독 우창칭(吳長慶)이 4500여 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군란을 진압했는데, 그 4500여 명의 군인들 틈에 위안스카이라는 23세의 청년 군인이 섞여 있었다. 그는 본국에서는 군수급 후보자 정도의 직위였지만, 조선에서는 최고위급 청나라 관리로서 행세할 수 있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벼락출세를 해서 그런지, 위안스카이는 이후 10년 동안 조선에서 참으로 방약무인한 행동들만 일삼았다.     조선에 부임한 위안스카이는 마치 섭정왕 같았다. 그는 감국대신을 자처하며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궁궐 문을 함부로 드나들었고, 조선 정부의 공식행사에서 언제나 상석에 앉았다. 무장한 채 궁궐 안까지 가마 타고 들어와 고종 임금에게 삿대질하기 일쑤였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 대해 극도의 내정간섭을 일삼을 뿐만 아니라 고종 앞에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 외교관들마저 그의 건방짐과 무례함을 비난할 정도였다. 그는 고종을 만날 때면 항상 삼읍례를 하곤 했는데, 이런 인사법은 대등한 관계에서나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국의 군주를 대등한 친구 정도로 대우한 것이다. 한때 위안스카이가 고종 폐위까지 도모한 적이 있었으니, 그가 얼마나 조선 조정을 우습게 여겼는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일본군이 진주하면서 청나라의 세력이 꺾일 때까지 그는 '조선의 총독'처럼 권력을 휘둘렀다. 갑신정변 때는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창덕궁에 진입해 고종을 '보호' 조치하면서 일본군 지원 아래 개화파가 단행한 갑신정변을 무산시켰다.   그는 조선의 외교문제에까지 간섭했다. 고종이 구미에 공사를 파견하려 하자 그는 '조선 공사가 주재국에 도착하면 반드시 청국 공사와 함께 주재국 외교부를 찾아갈 것, 공석에서 청국 공사 뒤에 입장할 것, 긴요한 사건이 발생하면 청국 공사와 협의해 그의 지시에 따를 것' 등 소위 '삼단(三端)'을 요구했다. 그는 또 청나라 상인의 조선 진출을 적극 지원했고, 밀수까지 눈감아주도록 세관에 압력을 넣었다. 한미수교 이후 주미한국공사로 부임한 박정양이 미국 클리브랜드 대통령에게 제정한 국서에 우리의 개국연호, ‘짐’ 등의 용어를 사용한 사실을 트집 잡아 박 공사를 부임 10개월만에 강제 소환했다. 박 공사는 위안스카이가 두려워 1년 가까이 일본에 체류하는 수모를 당했다. 위안스카이가 조선에서 활약한 12년은 한·중·일이 근대국가 수립을 위해 '시간과의 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던 때였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는 조선이 외교사절을 서구에 보내는 것까지 간섭하면서 발목을 잡았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와 불평등조약을 체결한 중국은 사실상 유일한 종속국으로 남아 있던 조선을 제국의 울타리 안에 붙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루 빨리 부국강병을 이뤄내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서 벗어나야 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위안스카이는 근대국가 건설의 발목을 잡은 ‘원흉’이었다.   서울 도봉구와 경기 의정부시에 걸친 도봉산에 있는 망월사(望月寺) 현판은, 당시 한성에 진주했던 위안스카이가 직접 쓴 것이다.  망월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한 고찰이다. ‘망월사’는 그 현판이 위안스카이에 의해 씌여졌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현판의 왼쪽에는  ‘주한사자원세개(駐韓使者袁世凱)’라는 글로 자신을 밝히고 있다. 쓴 때가  ‘광서신미중추지월(光緖辛未辛未仲秋之月)’이라고 기록하였으니 청일전쟁의 패전으로 조선을 떠나기 3년 전인 1891년이었다. 우리는 지난 수백 년(고려·조선) 중국의 지배 하에 살았다. 중국의 ‘속국’처럼 살았다. 그리고 근세에 와서 36년 간 일본에 병탄됐다가 2차대전 종전과 더불어 미국에 이끌려 대륙을 벗어나 태평양 쪽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한국인이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이후 70여 년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지리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의해 수백 년을 한반도에 갇혀 살다가 미국의 안내로 세계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처럼 사는 것은 우리 노력과 지혜의 결산이지만 미국이 기회를 제공했음은 사실이다. 역사는 우리가 앞으로 어디에 서고 어떻게 처신해야 나라와 민족을 보존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는지를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반중정서와 혐오정서가 고조되면서 ‘짱깨’라는 용어가 중국을 인식하는 주류 프레임이 됐다.. ‘짱깨’는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짱깨주의’ 현상은 인과관계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사드 보복에서 민낯을 보인 중국이 반중 감정의 씨앗을 뿌렸고, 여기에 문재인 정부의 대중 편향 정책에 대한 반감이 거름 작용을 한 것이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을 취재하던 한국인 사진기자 1명을 중국 정부 경호원 15명이 폭행해 안구출혈 중상까지 일어난 일도 있다. 쐐기를 박았던 건 2017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발언이다.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고, 다른 곳도 아닌 미·중 정상회담에서 말했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방중 당시 베이징대 연설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 “대국”, 한국은 “작은 나라”라 칭했다. 중국은 중화의 영광을 되찾는 과정에서 세계 곳곳에 반중 정서를 양산했다. 이웃 나라들을 힘으로 겁박한 중화제국주의가 중국 대망론과는 정반대인 혐중 짱깨주의를 낳은 것이다. 진정한 중국몽을 이루려면 중국은 민주주의·법치주의·인권의 보편 가치를 중국 문명에 담아내야 한다.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사람에겐 모두가 기꺼이 복종한다.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으로가 아니라, 힘이 모자라기에 복종을 하는 척할 뿐이다.” 중국의 맹자가 한 말이다. 중국엔 경제력과 인구 등 국력, 즉 힘은 있지만 덕이 없다.   올해는 한중수교 3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우리는 아시아에서 중국, 러시아, 북한이 하나의 안보 블록이 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결국엔 한·미·일 ‘3국 협력’으로 가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3국 협력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이전보다 대등하게 나서려는 새 정부의 바람과도 잘 맞는다. 한국 혼자 중국을 상대하면 중국으로부터 형편없는 대우를 받지만, 한국이 미국·일본과 관계가 돈독하면 중국은 한국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또 3국 협력은 아시아는 물론이고 글로벌 중추 국가로 도약한다는 윤석열 정부의 국가 전략과도 어울린다.  김지민 기자탄생 조선 공사 조선 정부 한때 위안스카이

2022-07-13

[시론] 조·미 수호조약과 한미 방위조약

1953년 미국과 맺은 ‘한미상호방위조약(Mutual Defence Treaty)’에 대해 한국인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140년 전 조선이 역사상 최초로 서양의 국가와 상호 ‘수호조약’을 맺었고 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882년 5월 22일 오전, 제물포항에 미국 측 전권대사 로버트 슈펠트 해군 제독의 거대한 함선 ‘타이콘데로가’호와 중국의 실권자 이홍장의 막료 마건충 일행이 탄 중국 군함이 입항했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시절, 조선 정부의 전권대사 신헌과 부사 김홍집은 중국 측 함선에 올라 중국 황제 쪽을 향해 ‘삼배구고두례’(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를 시행했다.     중국 대표는 조선은 중국의 속국임으로 중국 함선에서 중국 대표의 참석하에 조약을 체결해야 된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 측 슈펠트 제독은 “조선은 독립국이다. 조약 당사자만 조약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미국 함선에서 조선과 미국 간에 상호 ‘수호통상조약(Treaty of Peace, Amity, Commerce and Navigation, U.S.- Korea)’이 체결됐다. 조선이 개국한 지 490년 되는 때였다.     그런데 조선은 당시 자진해서 독립국 자격으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다. 중국 정부의 강자인 이홍장 북양대신의 주선과 압력에 따른 것이다. 이홍장 북양대신은 일본의 조선에 대한 야심을 막고, 중국이 조선의 종주국 역할을 계속하려면, 구미의 강대국을 조선반도에 끌어들여 힘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때 조·미간에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은 어느 정도 ‘우호적’이며 조선의 안보에도 도움이 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제1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만일 (조선이) 어떤 나라로부터 부당하게 강제적 일을 당했을 경우 (미국은) 이에 개입, 두 편의 중간에서 조정을 행사함으로써 (조선과의) 우호성을 보인다.”   하지만 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 정부는 강대국인 미국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하고도 그것을 국가 발전이나 국익을 위해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여전히 무기력해진 중국이나 또는 전혀 도움이 못 되는 러시아에 붙으려고만 했다.     미국은 조약 제2조에 있는 대로 전권대사 푸트 공사를 조선에 파견했고, 주한 미국 공사관을 개설했다. 하지만 조선은 조약이 체결된 지 1년 2개월 후에야 겨우 ‘보빙사’라는 외교 사절단을 미국에 보냈다.     만일 그때 조선 정부가 강대국 미국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한 다음, 일본이 ‘함포외교’ 이후 미국과 했던 것 정도로 실속 있는 후속 조치를 취해 나가고, 미국 후원하에 국방력을 강화했다면 그 후 조선은 개혁과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침략을 당하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미국은 조선을 독립 왕국으로 대우하며 높은 수준의 수호조약을 맺기는 했으나 당시 관리들의 부정부패, 자치능력 결여, 빈곤, 백성 착취 등으로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1905년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과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며 조선과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나라는 다시 그 실수를 재현한다”고 했다.     미국과의 철통 같은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국가 방위에서 우선순위임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역사적 교훈을 140년 전 조선과 미국이 맺은 수호조약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김택규 / 국제타임스 편집위원시론 수호조약 방위조약 조선 정부 부정부패 자치능력 전권대사 로버트

202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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